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푸트니크 쇼크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Now, somehow, in some way, the sky seemed almost alien. The profound shock of realizing that it might be possible for another nation to achieve technological superiority over this great country of ours. >지금, 왠지, 어떤 면에서인지, 하늘이 아주 낯설어 보였다. [[소련|다른 나라]]가 위대한 [[미국|우리 나라]]보다 기술 우위를 점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. >---- >[[린든 B. 존슨]] 당시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.[[https://www.darpa.mil/about-us/timeline/creation-of-darpa|#]] Sputnik crisis [[1957년]] [[10월 4일]] [[소련]]이 세계 최초의 [[인공위성]] [[스푸트니크]] 1호 발사에 성공했다. 이 일은 [[미국]]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미국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한다. 미국은 소련의 과학 기술이 생각보다 앞서 있다는 충격과 소련이 본토에서 핵미사일을 쏘면 막을 수 없다는 [[핵전쟁]]의 공포를 느꼈다. 이전까지는 폭격기를 통해서만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[[레이더]]로 감지하여 차단할 수 있었지만 소련 본토에서 미사일을 통해 여러 발의 핵폭탄이 동시에 대기권 밖에서 날아오면 당시 기술로는 이를 막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. 소련은 한 달 뒤인 11월 3일 스푸트니크 2호에 [[라이카(개)|살아있는 개]]를 태워서 쏘아올려 기술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. 미국은 급하게 [[뱅가드 위성]]을 뱅가드 로켓에 실어서 발사했으나 대기권 진입은 커녕 두 차례 연속 폭발하면서 망신을 당했다.[* 이때 소련은 사망자가 없음에도 아쉬움을 표하는 서문이나 위로문이 아니라 '''조문'''을 보냈다고 한다.] 1958년 1월 30일 [[익스플로러(인공위성)|익스플로러]] 1호 발사에 성공하면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지만 불과 5kg인 익스플로러 1호를 비웃듯 소련은 2월 3일 무려 1.3톤짜리 과학탐사 위성 [[스푸트니크#s-3|스푸트니크 3호]]를 발사했다.[* 당시 이를 두고 니키타 후루쇼프는 감자를 쏘아올렸다고 비웃었다.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직전까지 모든 부분에서 항상 소련이 한 발 앞서나갔다. 오로지 유인 달착륙, 추가로 우주선간 도킹 정도를 제외하면 최초의 생명체 귀환, 최초의 유인 우주선, 최초의 우주 유영, 최초의 행성 무인탐사선, 최초의 달뒷면 탐사 등 모든 유니크 타이틀은 소련의 차지였다. [[아폴로 계획|--그 한번이 너무 압도적이라는게 흠--]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